"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p.54
책 선물을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어디에서는 책 좀 읽으라는 뜻으로 주는 게 된다며 책 선물을 피하라는 말도 있는 것 같던데,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아는 친구가 나도 읽었으면 해서 선물해 주는 책은 당연히 기쁘다.
지나가다 배너 광고를 보든 서점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에 있든 유행하는 책은 표지라도 막연히 알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나에겐 그런 책 중 하나였고 올해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스스로 산 책도 한참을 미루다 읽곤 하지만 선물 받은 책은 그래도 한 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 여름이 오기 전에 읽었다. 읽을 때만 해도 킬리언 머피가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어느새 겨울이 되어 영화가 국내 개봉을 앞두었다.
원작이 있는 영화는 상상을 해치지 않기 위해 꼭 책을 먼저 읽고 봐야 한다는 작은 강박이 있는데 마침 읽어 둔 이야기의 영화 시사회에 갈 수 있다니! 멋진 기회였다.
시사회는 12월 4일에 진행됐는데, 전날 밤의 소란한 일로 정상적으로 진행될지 걱정이 되었다.
당일 오전 시사회 담당자분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듣고 보니 이 시기와 또 들어맞는 것 같기도 했다. 과연 영화를 본 사람들은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챙겨서 집에 갔을까?
자세한 영화 후기는 아래에 있다.
* 이하 영화 및 책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감독: 팀 밀란츠
주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왓슨 등
상영 시간: 98분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 원작
1. 종소리
영화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하고 종소리와 함께 끝난다. 책을 읽어 영화의 이야기를 이미 아는 입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갈수록 그 교회의 종소리가 다르게 들릴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종소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귀를 막아도 들을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면, 종소리가 닿는 곳에는 모두 교회의 눈이 닿고 있다.
2. 회색
종소리를 배경으로 커다란 화면을 보며 느낀 것은 회색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절묘하게도 내가 아일랜드라는 곳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맞물렸다. 회색의 영국에서부터 뻗어온 생각일까, 혹은 내가 기억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책 표지가 회색이어서였을까. 또는 내가 본 아일랜드 작가들의 문장이 건조하고 무겁지 않은 회색에 가까워서였을까.
펄롱이 늘 만지는 석탄은 결국 아주 짙은 회색의 뭉침이다.
3. 영화와 책
마침 최근의 모임에서 영상물과 책의 정보 전달력, 차이점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영상물이 조금 더 감상자에게 시간의 흐름을 강요한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영화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펄롱이 손을 씻는 장면이었다.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펄롱이 천천히 공들여 손을 씻는 장면을 아무리 늘여서 표현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행간을 길게 준다고 해도 여백을 넓게 출력한다고 해도 내가 넘겨서 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석탄이 잔뜩 묻은 손을 씻는 모습이 길게 영상으로 늘어지면 그것을 그냥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이 내게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4. 어릴 때의 기억은 얼마나 남는가.
빌의 어린 시절은 종종 현재와 교차한다. 여전히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현재의 빌에게 망령처럼 나타나 말을 걸기도 한다. 빌은 '몰라.'라고 대답하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영화에 생략된 장면 중에서, 기분을 묻는 빌에게 딸 캐슬린은 '친구들과 쇼핑을 가고 싶은데 엄마가 치과에 가야 한대',라고 얘기한다. 책에서는 그 부분에 유난히 눈길이 갔는데 영화에서는 생략되었다.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건드린 부분이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별 것 아닌 일을 못 하는 어릴 때의 슬픔은 몇 년이나 인생에 남아 괴롭히는가? 왜 며칠이면 맞추고도 남을 직소 퍼즐을 평생 쳐다보게 하고, 이제는 관심도 없을 장난감을 다 나이 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하게 하는가. 어른들은 종종 어린아이들의 바람을 그들의 크기만큼 작게 생각한다. 그 작은 머리를 꽉 채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도. 그리고 다 자라서는 별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포기했던 수많은 욕구를 잊어버린 채. 하지만 누구든 지금 집착하는 것을 잠시 되돌아보면 어린 날 가로막혔던 무언가였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5. 그래서 이 영화는
책을 보지 않고 영화를 먼저 본 친구는 영화의 전체 내용을 모두 흡수하진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오히려 책을 읽은 지도 몇 달이 되어 흐릿한 기억을 돌이켜 주어 좋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 시대의 모습을 나는 잘 몰랐기에 더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인물들의 생활상이 생각보다 더 현대라 조금 놀랐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영화를 보고 나서 책을 몇 장 넘겨 보니 짧은 책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생각보다 생략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주제의식은 확실히 전달되었지만 역시 그런 의식을 더 짙게 얻기 위해서는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빌이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실을 깨닫고 충격받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책에서의 충격이 훨씬 더 커서 아쉬웠다.
그래도 일단 킬리언 머피의 연기와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관심 있는 배우인 마크 맥케나도 나오는 줄 몰랐는데 반가웠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든,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읽든 책이 보여주는 이처럼 사소한 이야기들이 더 많으니 관심이 있다면 책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가 가기 전에 보면 더 좋을 영화이니 개봉했을 때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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